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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림여송
작성일 26-08-13 22:56 조회 1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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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착 18년 만에 모시떡으로 11개의 가맹.을 낸 박은숙 해오름푸드 대표.
지난달 14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제3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식. 이날 모범적인 정착으로 대통령 표창장 수여자로 호명된 이는 (주)해오름푸드 대표 박은숙 씨였다.
“북한이탈주민 출신으로 영농 정착과 식품가공업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자립했으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북향민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는 데 기여한 공로”라는 공적 내용만으론 그의 삶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대다수 탈북민이 그렇듯이, 박 씨 역시 굴곡 많은 인생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오늘에 이르렀다. 19세 꽃다운 나이에 매일 12시간 넘게 20~30㎏의 돌 마대를 나르며 3년이란 청춘을 허비했던 그는, 돌이 많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 여수 돌산에 정착해 아름다운 모시꽃을 피워내고 있다.
그가 태어난 북방의 도시 청진에서 남해안의 섬 돌산까진 직선거리로 800㎞가 넘는다. 집을 떠나 2000리 먼 길을 헤쳐 남해안 섬에 이르기까지 20년이 넘게 걸렸다. 이제 돌산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 그의 ‘인생 나무’는 앞으로 얼마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일까.
여수 돌산에서 직접 모시 재배를 하고 있는 박 씨.
● 항상 배고프던 어린 시절
박 씨는 1979년에 북한에서 ‘철의 도시’라고 불리는 함북 청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가정환경은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는 김일성정치대학을 졸업한 군관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하지만 12세 때 아버지가 종양이 생겨 제대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즈음 어머니도 교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주부로 살았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은 아버지 병을 고치느라 .. 더 거덜이 나기 시작했다.
박 씨의 어린 시절 기억은 배고픔으로 기억된다. 청진은 북한에서도 일찍 배급이 중단된 도시다. 1990년대 초반에 노동자들의 배급을 제대로 주지 못했고,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0년대 중반 이전에 아사자들이 나왔던 도시였다.
어머니는 세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찍 장사를 시작했다. 박 씨는 멀리 장사를 나가 며칠씩 들어오지 않는 어머니를 손꼽아 기다리며 배고픔을 달랬다.
학교에 가면 교복을 입지 않은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망신을 주었는데, 박 씨는 늘 맨 마지막까지 교복을 입지 못하는 여학생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학생 교복을 ‘국정 가격’으로 상.에서 팔았는데, 교복을 살 돈도 없었던 것이다. 남녀 공학인지라 너무나 창피했지만, 그럼에도 학교는 열심히 다녔다.
하지만 가난은 。. 더 가족의 목을 조여 왔다. 1996년경이 되니 어린 남동생이 거리에 나가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상황까지 이르게 됐다. 그러자 아버지는 온 가족을 데리고 청진 인근의 깊은 산골에 들어가는 결단을 내렸다. 부업 밭을 지키는 경비 자리를 얻었던 것이다.
중학교 졸업반이었던 17세 박 씨도 함께 산골로 갔다. 깊은 산골짜기에 쓰러져가는 움막 같은 곳을 집이라고 정하고 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산골에 오니 도토리라도 주어 먹을 수 있어 좋았다. 학교까진 걸어서 한 시간 반이 걸렸는데, 같이 다닐 친구도 없었다. 숲속에서 나와 공부하고 다시 숲속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반복됐다.
그럭저럭 학교를 졸업한 박 씨는 근처 외화벌이 사업소에 취직했는데, 하는 일은 양귀비를 재배하는 일이었다. 당시 북한은 “마약을 생산해 미국을 중독시키는 것은 미제와 싸우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한 김일성의 지시로 전국적으로 아편 재배를 장려했다. 북한은 양귀비에서 아편을 뽑고, 아편에서 다시 헤로인을 만들어 해외에 팔았다.
낮에는 양귀비 재배를 하고, 쉬는 시간엔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고, 집 농사도 돕고, 가을엔 사람들이 깊은 산에서 채취한 송이를 몰래 넘겨받아 시내에 가서 파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래도 굶어 죽진 않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굶어 죽지 않는 것, 그것이 그때까지 박 씨가 알고 있던 사람이 사는 이유였다.
박 씨가 2015년경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채소로 반찬을 만들어 팔고 있는 모습.
● 지옥에서 바친 3년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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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 그가 사는 지역에서 평양-남포 고속도로 건설돌격대가 모집되기 시작했다. 거기서 일을 잘하면 노동당에 입당을 시켜준다고 했다. 19세 박 씨에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에게 있어 노동당원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신분 상승을 의미했다.
“반드시 노동당원이 되리라.”
그가 돌격대에 자원해 도착한 곳은 평양과 남포 사이에 있는 어느 벌판이었다. 1998년 11월에 착공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된 이 고속도로는 46.3㎞ 길이에 왕복 10차선으로 돼 있다. 46㎞의 고속도로를 완공하는 데 5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동원됐고, 2년 동안 순수 등짐으로 건설한 개미역사(役事)였다.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 와중에 김정일은 왜 폭이 64m나 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을까. 비상시 잠수함이 대기하고 있는 남포항까지 최단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도주로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이 도로 건설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곳을 지옥으로 묘사했다. 박 씨가 어두컴컴한 반토굴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곧바로 돌을 날라 오는 작업이 시작됐다.
멀리 돌산에 가서 정대를 박고 해머를 휘둘러 돌을 캐낸 뒤 그걸 다시 망치로 나를 수 있는 크기로 부셨다. 그리고 20~30㎏ 정도를 마대에 메고 도로까지 운반했다. 아침 7시부터 작업이 시작돼 저녁 7시 반까지 일을 해야 했는데, ‘입방과제’라고 불리는 개인별 할당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면 저녁 늦게까지 남아서 완수해야 했다.
2년 내내 강냉이밥과 염장무 소금국을 먹고 살았다. 숙소는 전기도 없는 반토굴 움막이었는데, 겨울과 여름의 혹독한 날씨를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해도 씻는 시간은 일주일에 단 한 번 허용됐다. 천으로 대충 가린 도랑이 목욕탕이었고, 도랑엔 흙탕물이 흘렀다. 각종 전염병이 수시로 퍼져 사람들이 쓰러졌다.
특히 여름에 모기에 고스란히 뜯기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기에게 물린 다리는 허벅지까지 퉁퉁 부어오르기 일쑤였는데, 약도 없었다. 다 곪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늘로 찌르면 고름이 피처럼 줄줄 흘러나왔다.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몇 달 버티지 못하고 도망을 쳤다. 이런 지옥에서 2년 내내 견딘 사람은 극소수였는데, 박 씨는 그 극소수에 포함됐다.
차로 30분도 걸리지 않는 그 도로엔 박 씨를 포함해 수만 명 청년들의 피땀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렇게 건설해 제대로 활용됐으면 덜 억울할 일이다. 건설이 끝난 뒤 김정일은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대통로’가 완성됐다며 도로에 ‘청년영웅도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지금 청년영웅도로는 차선도 없는, 곳곳에 구멍이 생긴 누더기 도로로 유지되고 있으며, 소달구지들이 한가하게 다니는 포장된 공터로 보인다.
19세부터 21세까지 청춘을 바쳤건만 박 씨에도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노동당에 입당시켜 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박 씨의 가장 찬란한 청춘 시절을 빼앗아 간 평양-남포 고속도로. 수만 명의 피땀이 헛되게 사라졌다. 동아일보 DB
● 노력할수록 빚만 늘었다
그렇게 속고도 박 씨는 체제를 원망하지 않았다. 어리니까 아직 부족함이 많아 당원이 되지 못했다고만 생각했다.
다시 산골에 돌아온 그는 예전처럼 송이 장사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북한에서 금과 송이는 개인 거래가 엄격히 금지돼 있다. 이를 외국에 수출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노동당 39호실에만 있다. 송이를 불법 거래하는 것은 당 자금을 훔친 것과 똑같이 간주해 처벌된다.
송이철에는 농촌마다 39호실 산하의 수매소가 들어와 사람들이 산에서 캔 송이를 받는다. 하지만 송이 1㎏을 가져가면 기름 1리터나 밀가루 3㎏을 주는 식으로 대가는 보잘것없다.
그래서 처벌을 무릅쓰고 송이를 중국에 몰래 파는 밀수업자들이 생겨났는데, 중국에 팔면 당에서 쳐주는 값의 열 배 이상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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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는 사람들이 캔 송이를 산 아래서 넘겨받은 뒤 수매소가 아닌 밀수업자에게 되파는 일을 했다.
북한과 같은 신용 제로의 약육강식의 사회에선 21세 어린 처녀는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했다. 송이를 넘겨받아 두만강 옆에 사는 사촌 동생의 지인에게 넘겼는데 사기를 당했다.
돈을 받으려 찾아간 밀수꾼의 집에서 그는 처음 중국 TV를 보게 됐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생머리가 찰랑거리는 샴푸 광고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샴푸가 뭔지도 몰랐다.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냥 “저런 세상도 존재하는구나” 싶어 넋이 나갔다.
돈을 사기친 지인은 계속 돈을 준다, 준다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돈을 받기 위해 몇 차례 더 국경으로 가면서 그는 비로소 밝음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강 건너 중국은 늘 전기가 끊기지 않는 밝은 동네였다. 중국이 어떻게 사는진 잘 몰라도 “저긴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는 생각은 들었다.
돈을 받지 못하는 기간이 길면서 그는 곤경에 빠졌다. 결국 2002년 박 씨는 모험을 했다. 국경에서 물품을 받아 황해도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한 것이다. 종잣돈을 다시 마련하려고, 빌린 돈으로 물건을 사서 떠났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갖고 간 물건이 팔리지 않아 두 달 남짓 있다 보니 여비가 이윤보다 훨씬 많아진 것이다.
인생이 걸린 돈을 두 번씩이나 날리고 보니 더 이상 북한에서 살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이런 그에게 은밀한 제안이 왔다. 중국에 시집을 가면 중국돈 1000위안을 준다는 것이다. “그럼, 중국에 가볼까….”
믿는 구석도 있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중국 연고자라, 중국에 친척들이 많았다. 6촌 형제들만 6명이 있었다.
모시떡을 만들어 판매하던 초창기의 박 씨 모습.
● 조선족으로 한국 입국
2003년 2월 박 씨는 두만강을 넘었다. 하지만 하필 건너간 시기가 사스 파동으로 모든 이동이 통제될 때라 내륙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두만강 근처의 친척 집에 한 달간 얹혀 있다가 다시 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니 이번엔 보위부 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 동안 어디에 가 있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캐기 시작했다. 그대로 있으면 중국에 있다가 돌아온 사실이 발각될 것 같아 그해 4월 다시 중국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두만강에 뛰어들어 둥둥 떠내려오는 얼음장을 손으로 밀어내며 가까스로 건너편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그는 다시 북에 가지 않았다. 그해 여름 친척들이 많이 사는 흑룡강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한 6촌 친척이 깊은 산골에 사는 자기 시동생을 소개해 주었다. 농사를 하는 동네였다. 산골에서 살았던 박 씨에겐 견디지 못할 곳은 아니었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중국 호구까지 사서 신분을 세탁했다. 중국에서 4년을 살았다. 먹고 살 순 있었지만, 농촌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사는 기간이 길면서 그는 한국이 훨씬 더 잘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주변에서도 한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와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한국에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친척 중 한 명이 한국어능력시험을 쳐 일정한 수준이 되면, 한국에 가서 일할 수가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북한에서 산 그에게 한국어 시험은 그리 어려운 장벽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 갚겠다는 조건으로 빚을 내 비자도 만들었다.
마침내 2007년 12월 그는 중국동포(조선족)의 위장 신분으로 배를 타고 한국에 입국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탈북민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다른 조선족 여성들이 그러하듯 처음에는 서울 신림동에 먼저 온 조선족 여성의 반지하방에 얹혀살며 식당 일을 하기 시작했다.
비자 비용으로 지불한 2만 위안의 빚을 갚기 위해 월급 130만 원을 절약하고 또 절약하며 악착같이 일했다. 그렇게 9개월을 일해서야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까지 그의 인생은 빚에서 벗어나는 투쟁이기도 했다. 북한에서 빚을 지고 탈북했는데, 중국에 와서 정착한 집도 빚이 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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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씨는 농사를 하는 한편, 시장에 나가 각종 반찬을 만들어 팔아 그 빚도 갚았다. 그리고 한국에 오기 위해 다시 빚을 졌고, 그 빚을 또 다 갚은 것이다.
중국 품종의 매운 고추를 재배해 시장을 개척하던 10여년 전의 박 씨 모습.
● “나만 행복해도 될까.”
한국에서 생활하는 기간도 늘어가고, 드디어 빚이 없는 몸이 됐을 때쯤, 그는 다른 탈북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됐다. 하지만 신분을 숨기고 온 터라 자수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민을 가까운 조선족 친구에게 이야기했는데, 그 이야기가 그만 일하던 국밥집 사장 귀에 들어갔다.
사장이 그를 찾더니 당장 짐을 싸서 나가라고 했다. 2008년 9월은 자신이 간첩이라고 주장하던 ‘원정화 간첩 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였다. 사장은 조선족으로 신분을 감춘 탈북 여성을 계속 일 시키다간 좋지 못한 일에 연루될 것이라 우려했던 것이다.
어제까지 친절했던 사장이 갑자기 태도가 바뀌니 박 씨는 충격에 빠졌다. 당장 갈 데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서울의 한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했다. 탈북민 중에는 박 씨처럼 중국 위조 신분증으로 입국했다가 나중에 자수하는 사람들이 종종 나온다. 그러니 박 씨의 사례는 그리 예외적인 일은 아니었다.
조사기관과 하나원에서 박 씨는 오히려 유명 인물이 됐다. 한국에 갓 입국해 조사를 받는 탈북민들에겐 앞으로 자신들이 살 한국 사회가 어떤 곳인지가 가장 궁금하다. 그런데 박 씨는 무려 9개월이나 서울에서 취직해서 살았으니, 그들에겐 선각자인 셈이다. 그의 주변엔 늘 서울 생활이 궁금한 다른 탈북민들이 붙어 있었다.
하나원 과정까지 마친 그는 2008년 11월 마침내 한국 사회에 나왔다. 이제 정식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이다. 그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임대주택을 받았다. 높은 지형에 있는 아파트인 데다, 22층 집을 배정받다 보니 서울 전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짐을 푼 첫날, 그는 63빌딩보다 높은 곳인 집 베란다에 나가 마시지도 못하는 맥주 한 캔을 따놓고 앉았다. 휘황찬란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니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죄책감이 그를 아프게 했다.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왔구나. 가족을 두고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이상한 일이었다. 인파로 가득한 서울에 정착해 사니 마음은 오히려 더 외로웠다. 다들 의지할 가족이 있고, 힘든 사연을 터놓을 사람이 있는데, 혼자만 고층 숲속에서 외롭게 헤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농촌에서 쭉 살아온 그에게 시끄러운 도시는 몸에 맞지도 않았다.
이듬해 지인이 그에게 전남 광양에 사는 회사원을 소개해 주었다. 마침, 서울을 떠나고 싶었던 탓인지 만난 남성도 마음에 들었다. 2009년 겨울 그는 서울 집을 정리하고 전남 광양에 정착했다. 숱한 고생을 헤쳐 왔지만, 그의 나이 겨우 30세에 불과했다.
2012년 온실에서 영채를 재배하던 시기의 박 씨.
● 영채 김치로 시작한 영농
이듬해 딸이 태어났다. 임신했을 때 유독 먹고 싶었던 음식이 있었다. 영채 김치였다. 영채 김치는 북한 함경도와 중국 연변 지역의 향토 김치로, 갓과 비슷하게 쌉싸름하고 고추냉이처럼 톡 쏘는 알싸한 맛이 특징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영채 김치를 파는 곳이 없었다.
“영채가 없으면 내가 심어 먹으면 되지.”
2011년 4월 그는 시내 주변의 하우스를 임대해 중국에서 들여온 영채를 직접 심었다. 영채는 함경도 이북 지역의 추운 곳에서만 자라는 식물로 알려졌다. 다른 채소에 비해 수확량이 적어 귀하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함경도 이외의 지역에선 영채를 구경하기 힘들다.
또한 영채는 토양과 기후에 따라 독특한 맛을 내기에 다른 곳에서 재배한다고 해도 본래의 맛과 똑같지 않다. 그런 영채를 박 씨는 한반도의 맨 남쪽 광양에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배한 영채로 김치를 만들어 주변에 나눠주기도 하고 팔기도 했는데, 영채 김치의 독특한 맛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영채를 심어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 열심히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함북 출신의 탈북 여성이 남해에서 영채를 재배한다는 것이 좋은 기사 소재인지라 무려 6개의 방송사가 와서 그를 찍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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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보하면 영채가 잘 팔릴 줄 알고 방송에 출연했는데, 이것이 큰 실수였다.
영채의 상업성에 눈을 뜬 강원도와 경기도 등 다른 지역의 농민들이 영채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이 크지도 않은데, 북쪽에서 경쟁자들까지 등장하니 더는 영채 장사가 수지가 맞지 않았다. 영채 농사는 2년 만에 접었다.
영채 농사는 접었지만, 그에겐 3000평 규모의 온실이 생겼다. 그리고 2년 동안 농사를 해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매일 아침 밤새 쑥쑥 자란 작물을 보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영채가 안 되면 다른 것을 심으면 되지.”
영채를 통해 가능성에 눈을 뜬 그는 다시 한국에선 재배하지 않는 품종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은 것이 중국 매운 고추, 껍질째 먹는 콩, 공심채 등이었다. 이런 작물은 한국 사회에선 낯설었지만, 구로나 대림, 안산처럼 중국 출신 거주자들이 많은 곳에선 잘 팔렸다.
그는 자신이 재배한 작물을 싣고 서울로 올라와 골목마다 다니며 직접 팔았다. 중국에서 수입해 오기보단 훨씬 더 싱싱한 채소들이 등장하니 상인들이 좋아했다. 이때 나름 돈을 적잖게 벌었다고 박 씨는 회상했다.
하지만, 이 장사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3~4년 지나니 또 경쟁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수도권에서 재배해서 식당마다 도매하는 사람들을 전라도 끝에 사는 그가 이길 순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돈 버는 재미에 빠져 하우스를 넓히며 무리하다보니 허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19세 나이에 평양-남포 고속도로 공사에 나가 3년 동안 돌 마대를 나르며 골병이 들었던 탓인지 그는 척추 협착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2016년에 그는 벌였던 농사일을 접어야 했다.
코로나 기간인 2022년 동네 어르신들 대상으로 송편을 만들어 봉사하고 있는 모습.
● 모시떡을 만나다.
개척했던 시장을 두 번이나 뺏기고 나면 화가 나서 그 동네를 뒤돌아보지도 않을 법도 하지만, 박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시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냥 농산물을 지어 팔아선 또 실패할 게 뻔했다. 허리도 예전과 같지 않아 무리하면서까지 농사일하기도 어려웠다.
“채소를 재배해 팔지만 말고, 내가 재배한 채소로 뭔가 2차 생산물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가공 공정까지 갖추면 쉽게 시장을 내어주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후 3년은 어떤 채소를 생산할지 연구하는 기간이었다. 각종 작물을 재배하고, 그 작물로 어떻게 하면 차별화된 2차 가공품을 만들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모시떡이었다. 처음 모시떡을 먹어봤을 때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차지게 씹히는 그 맛에 감탄했다.
모시떡은 떡에 모시풀을 넣은 것을 의미하는데, 쑥떡과 비슷한 생김새이지만 쑥떡보단 더 맛이 진하고 독특하다. 쑥떡에 비해선 덜 대중화됐고, 조리법도 지방마다 다르다.
박 씨는 북한에서 쑥떡을 많이 해 먹어 봤다. 별미로 먹은 것이 아니라,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봄마다 쑥을 캐서 곡물에 버무려야 했다. 쑥으론 송편을 빚기가 힘들다. 박 씨는 쑥떡과 비슷한 맛과 모양이면서도, 송편을 만들면 훨씬 보기 좋은 모시떡의 매력에 빠졌다.
“그래, 이거다.” 그는 인근 광양에서 모시 뿌리를 캐서 밭에 심었다. 모시로 떡을 만들었는데, 먹어봤던 떡 느낌이 나지 않았다. 주변에 돌려 평가받아도 좋은 반응이 오지 않았다.
유명하다는 모시떡 집에 찾아가 몇 달 동안 돈 받지 않고 일하면서 비법을 배워오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또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수백 번을 이렇게도 만들어보고, 저렇게도 만들어보면서 자기 입에 맞는 모시떡 맛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7~8개월을 보낸 뒤, 마침내 원하는 맛의 배합 비율을 찾았다. 그는 여수 소라면사무소 옆에 작은 가게를 만들어 모시떡을 팔기 시작했다. 가게 이름은 ‘모시보드레떡’이라 달았다. 보드레는 부드럽고, 야들야들하다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다.
박 씨가 여수 돌산읍에 만든 120평 규모의 모시떡 가공 공장.
● 5년 만에 11호 가맹. 오픈
2019년 9월의 추석을 그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의 떡이 맛있다는 소문이 나고, 추석까지 겹치니 가게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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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터진’ 것이다. 가게 앞 손님들을 보며 그는 눈물을 훔쳤다.
“이제 드디어 평생을 가져 갈 나만의 아이템을 찾았구나.”
애초에 그는 가게 하나만 운영하며 아이를 키우려 했다. 그런데 떡집을 자주 찾던 손님이 그에게 가맹。을 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여기서도 팔고 다른 곳에서도 팔면 당연히 좋을 것이라고 선뜻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가맹.을 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제일 어려운 것이 식약처의 해썹(HACCP) 기준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해썹 기준에 통과하려면 원재료 보관실, 제조·가공실, 포장실, 화장실 등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벽이나 칸막이로 공간을 나누어야 했다. 그가 운영하는 20평 규모의 작은 가게에선 어림도 없어 40평짜리 가게로 옮겨가야 했다.
제일 어려웠던 것은 식품 안전 용어, 공정 단계별 표현, 감사 관련 영어 시험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밤마다 머리를 싸매고 영어 단어를 외웠고, 많은 돈을 들여 컨설팅도 수시로 받았다. 컨설팅 담당자는 울면서 인증 준비를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혀를 찼다.
해썹 기준을 통과하는 것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북에서 온 그는 불과 2개월 만에 해썹 인증을 받았다. 그리고 2021년 1호 가맹。을 냈다.
1호。 장사도 잘 됐고, 모시보드레떡이 맛이 있다는 소문이 .。 퍼지자 여기저기서 자기들도 가맹.을 내겠다는 문의가 왔다. 불과 5년 사이 그의 모시떡 가맹。은 꾸준히 ‘북상’해 왔다. 광양에서 시작해, 순천과 광주를 거쳐 화성까지 가맹。은 11개로 불어났다.
규모가 커지는 것과 비례해 떡의 종류도 다양화해야 했다. 박 씨는 모시 송편류(기피, 통도부, 개떡, 녹두, 검은깨, 흰, 오색), 찹쌀떡류(팥, 크림치즈, 검은깨), 앙금 절편, 가래떡, 인절미, 잎새 절편, 떡국 등 다양한 종류의 모시떡을 개발해 가맹。과 쿠팡 등 온라인 쇼핑몰에 공급하고 있다. 일부 모시떡 종류는 작년부터 미국과 호주로 수출까지 되고 있다.
늘어나는 매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그는 ‘해오름푸드’라는 농업회사법인을 만들었고, 여수 돌산에 땅을 사서 재배와 가공을 함께 하는 기지를 만들었다. 2년 전에 돌산에 들어선 120평 규모의 공장은 박 씨가 모든 구조와 공정을 직접 설계한 것이다.
이 공장에선 요즘 하루에 각종 모시떡을 2톤씩 생산한다. 공장 옆 수천 평의 땅에선 직접 모시도 재배한다. 지난해엔 농촌 융복합산업(6차 산업) 사업자 인증도 받았다.
모시보드레떡 시장을 개척해 한국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살아가고 있는 박은숙 대표.
● “저는 운 좋은 사람입니다.”
숨 가쁘게 달려왔지만, 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시보드레떡의 북상은 서울까지 이르지 못했다. 향후 3년 안에 서울을 포함해 전국에 30개의 가맹.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러면 현재 11억 원 정도의 연 매출도 30억 원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
모시떡 사업을 시작한 뒤로 박 씨는 집에서 온전히 보낸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다. 쉬는 날에도 공장에 나와 쉬어야 마음이 편하다. 외국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렇게 부지런히 노력해 이룬 것들이지만, 박 씨는 혼자 이룩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멋모르고 시작했는데, 주변에서 너무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북에서 저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고 믿어주어 계속 달려올 수 있었는데, 정말 너무 감사한 일이죠. 앞으로도 폐업하지 않고 계속 이대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북한에서 계속 살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깊은 산골에서 자기 것도 아닌 노동당의 양귀비나 협동농장의 옥수수, 콩 농사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봄마다 산을 누비며 쑥을 캐 옥수숫가루에 버무려 배고픈 아이들을 먹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씨는 일한 만큼, 능력만큼 대가를 얻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제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다만 운도 노력해야 찾아온다는 것이 제가 얻은 교훈입니다. 한국에 정착한 다른 탈북민들도 어렵다고 좌절하지 말고, 돌산에서 모시를 키우는 저를 보고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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